문병호 호남미래포럼 공동운영위원장ㆍ 전 중앙일보시사미디어 대표

입력시간 : 2015. 11.27. 00:00

호남을 일컫는 별칭은 의(義)향, 예(藝)향이 대표 격이다. 옳음을 추구하고 예술을 즐기는 고장이라는 뜻이니 더할 나위 없는 평가다.

평가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호남과 호남인은 이런 별칭만으로도 어디서나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됨직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을 우리는 다 안다. 이유가 무얼까.

정의와 예술이라는 가치가 지금 호남의 실제 이미지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어서 일듯 싶다. 중요한 것은 실제이니 정직하게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자. 과연 우리 호남인들이 다른 시도 주민들보다 더 정의로운가, 정의로움을 추구하는가. 예술이 호남인의 생활 속에서 일상의 일부로 향수되고 있는가. 예술 전반에 대한 이해와 애호가 다른 지역보다 높고 지속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가. 일제침략 이전 전통사회에선 어느 수준 수긍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라고 본다.

임란 의병, 동학 혁명, 광주학생독립운동과 5ㆍ18 민주화 운동의 연면한 전통이 있으니 의향을 자부할 근거는 충분하지만 이것이 오늘의 지역 현실을 정의롭다고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에 이르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여유를 기반으로 한다. 가난한 예술가는 있어도 돈 안 드는 예술은 없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는 말에서 예절을 예술로 바꿔도 동서고금에 통하는 진리다.

예향 호남의 전통도 실은 산업화 이전 농업사회에서 지역의 경제적 여유를 반영한 것이다. 기정사실이 된 호남, 특히 광주ㆍ전남의 경제적 낙후는 예향의 기반이 취약함을 뜻한다. 호남의 낙후로 대표되는 지역격차 문제는 '한국병'의 중요한 측면이나 분노하고 비난하고 책임을 따지고 특별배려를 요구하는 방식만으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것도 이제 분명하다.

정당한 권리확보 노력과 함께 냉철한 자기성찰을 토대로 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필자는 광주 전남이 의향, 예향에 더해 부향, 덕향이 되기를 소망한다. 부유하고 덕이 넘치는 고장이 되기 위해 내부에서는 치열한 선의의 경쟁을 하고 밖으로는 힘을 모아 이미지를 바꾸어가는 노력을 꾸준히 해가자는 뜻이다. 부자 고장이 되는 것은 예향이 되는 기반이다. 상대의 부족함마저 싸안는 푸근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의 이미지는 '의향'이 풍기는 강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보완할 것이다.

무엇보다 전통사회 광주ㆍ전남 지역의 분위기가 실은 바로 부향, 덕향 이었을 것으로 본다.

너른 평야와 풍요로운 바다가 가져다준 물산의 다양함과 풍부함은 경제적 여유가 되고 전통예술 시장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경제적 여유는 사람들의 마음도 너그럽게 만들어 정이 넘치는 상호배려의 인간관계가 보편문화로 수용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 토대 위에서 정의로움을 추구하고 예술을 즐기는 전통이 부각되었기에 다른 지역으로부터도 의향, 예향이란 별칭으로 공인을 받은 셈이다.

부향, 덕향을 지향하자는 제안은 의향, 예향의 기반을 새롭게 확보하자는 얘기이고 산업화 이후의 낙후를 극복하고 전통사회에서 가졌던 비교우위의 경쟁력을 회복하자는 의미다. 필자가 '21세기 청해진 건설'을 광주전남의 미래비전으로 제안하는 배경도 그것이다.

필요한 것은 인류문명이 산업화의 과정을 지나 정보화의 단계가 성숙하고 있듯이 광주ㆍ전남이 새로운 문명 환경에 온몸으로 적응하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새 출발을 하는 일이다. 산업사회 패러다임을 전제로 과거의 정서를 곱씹고 진부한 논리를 반복하는 것은 한마디로 시간 낭비다. 전통 제조, 서비스업이 일제히 위기에 빠진 세계경제 상황을 보면서 왜 호남에는 공장이 없느냐고 푸념하는 대응은 시대착오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길이 열린다.

문명의 현 단계를 압축하는 표현은 '불확실성의 시대'다. 다른 말로 하면 정답이 없다. 그래서 21세기 장보고가 필요하다. 광주ㆍ전남은 철 지난 산업사회의 정답을 찾으려 헤매지 말고 정보화 이후의 진로를 개척하는 제2, 제3의 장보고를 키워내야 한다.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호남미래포럼'이 활동의 지표를 "사람을 키우자, 기업을 키우자"로 정하고 교육혁신과 기업 활동, 창업 지원에 초점을 맞추려는 것도 같은 취지다.

12월로 창립 2주년을 맞는 포럼은 총론, 개론의 논의는 이제 할 만큼 했다고 보고 이제부터는 각론에 해당하는 현장의 실천 활동에 역량을 모을 방침이다. "꿈은 크게 실천은 소소하게"가 포럼 활동의 내부 지침이다. KTX 운행, 빛가람 혁신도시 가동에 이어 광주 아시아 문화전당이 정식 개관했다. 새로운 전략을 펼칠 최소기반은 확보된 셈이다. 2016년이 '21세기 청해진 건설' 대장정을 시작하는 새 출발의 원년이 되기를 기원한다.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호남미래포럼 기자  honamf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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