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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 2호남의 인물순례 1
내산서원

KBS ‘역사 스페셜’

2002년 KBS 역사스페셜서 수은 강항(姜沆, 1567-1618)이 방영되었다. 유인촌이 해설하는 이 방송의 첫 머리에는 가수 조용필이 부르는 ‘간양록 看羊錄’ 노래가 애절하게 흘러나온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 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 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이 노래는 1980년에 신봉승 작가가 쓴 드라마 '간양록'의 주제가인데,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영광 출신 선비 수은 강항의 ‘포로실기’ 제목이기도 하다. (주1)

 

형조좌랑까지 한 관료이자 유학자인 강항은 1597년 9월23일에 영광 앞바다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일본 수군에게 잡혔다. 그를 잡아간 수군은 1597년 9월16일 명량해전 시 일본 수군 총대장이었던 도도 다카토라 (藤堂高虎 1556~1630)의 부하 노부시치로(信七郞)였다. 강항은 일본 시코쿠(四國)지역의 오즈성(大津城 : 현재 에이메현 愛媛県 오즈시 大洲市)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시작하였다. 얼마 후 그가 주자학자라는 신분이 알려지자 일본 측의 대우가 변했다. 강항은 금산(金山) 출석사(出石寺)의 승려 요시히도(好仁)와 교류하였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 지리 등을 알아냈다.

 

이후 그는 1598년 8월8일에 오즈성을 떠나 9월11일에 오사카에 도착 하였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도착하였다. 강항은 그곳에서 지내면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 아카마쓰 히로미치 등을 만났고 1600년 4월2일에 교토를 떠나 5월19일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 방송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선비 강항이 일본에 무엇을 남겼는지를 살피고 있다. 먼저 <역사스페셜>은 일본 오즈시의 강항 현창 사업을 소개하고 있다. 오즈시는 시민회관 앞에 ‘홍유 강항 현창비 鴻儒 姜沆顯彰碑’를 세웠다.(주2)

 

또한 오즈시 초등학교 사회과목 부교재에 ‘조선 선비 강항’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강항이 31살 때 포로로 오즈성에 압송되어 왔으며, 그때 유교를 가르쳐 일본 유교의 근본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한편 50명의 회원이 참가한 ‘강항 연구회’ 활동도 활발하여 책도 발간하고, 강항의 발길이 닿은 곳을 답사하기도 하였다. 강항이 일본에 처음 도착한 나가하마(長浜)주3) 해안에서 오즈성까지 나무 표시판을 세우고 그 옆에 강항의 한시도 새겨 놓았다. 오즈시 사람들의 강항 기리는 정신이 참으로 놀랍다.

 

한편 강항은 교토 후시미 성에서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그에게 주자학을 가르쳤다. 세이카는 에도 시대 주자학의 비조 鼻祖이다. 그의 제자 하야시 라잔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의 대학두 大學頭로 활동하였고 자손들이 대학두를 세습하였다. 하야시 라잔은 ‘사상계의 쇼군’으로 불렸다. (주4)

 

에도 막부는 하극상의 사무라이들에게 신분질서의 주자학을 가르침으로써 270년간 도쿠가와 쇼군 시대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강항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혹은 제2의 왕인 王仁 으로 일본에서 추앙받고 있다.

 

이 방송은 내레이터 유인촌의 멘트로 끝맺는다.

"우리의 선조임에도 우리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연구되어 진 인물,

우리보다 일본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인물. 이제 더 이상 우리 역사 속에 묻힌 인물로 머물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강항을 만나는 이유입니다."

 

이 멘트를 들으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후학들이 강항 선생 현창에 소홀히 하고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강항을 재조명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강항 선생을 모신 영광군 내산서원을 답사했다. 이곳에서 강항과 후지와라 세이카 · 아카마쓰 히로미치등의 만남과, 강항이 일본 주자학에 미친 족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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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강항은 세조 때 명신 사숙재 강희맹의 5대손이며, 강극검의 아들이다.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93년(선조 26)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자 · 박사 · 전적을 거쳐, 공조 · 형조 좌랑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영광 수성에 참여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호조참판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 보급에 나섰다가 남원이 함락 당하였다. 고향인 영광에서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으나 일본이 영광을 함락하자 무산되었다. 이후 강항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순신 수군에 합류하려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 오즈성[大津城]에 압송당하였다.

 

<간양록>은 강항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서 겪은 포로 생활과 일본의 역사와 지리, 정치상황과 대책 등을 기록한 문집이다. 당시의 여러 일본 견문록 중에서 가장 상세하고 체계적인 저술로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많이 인용하였고, 일본도 이를 번역 출간하였다.

 

<간양록>은 번역본이 3가지이다. 이을호 박사가 번역한 간양록(서해문집, 2005년 발간), 북한 학자 김찬순이 옮긴 간양록(보리, 2006년 발간), 그리고 한국고전번역원 인터넷 사이트 <한국고전종합 D/B> '해행총재/에 있는 간양록(신호열 번역, 1974년)이 그것이다.

 

주2) 일본 에이메현 愛媛県 오쯔시 大洲市의 홍유 강항 현창비 鴻儒 姜沆顯彰碑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적혀 있다.

 

조선왕조시대의 탁월한 학자 강항(姜沆 号: 睡隠)은 풍신수길(豊臣秀)이 조선으로 재출병(정유재란)때 등당고호(藤堂高虎: 도도 다카토라)의 수군에게 포로가 되어 두 형인 준(濬)・환(渙)과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이예(愛媛県)의 대주(大洲)로 연행되었다.

 

10개월 간 대주성(大洲城)에서 강항 생활은 학자로서 대우를 받아 금산 출석사(金山 出石寺)의 중들과 교유(交遊)하였다. 한시(漢詩)로 응수하며 매일을 자유롭게 보내는 신분이었다. 교토 복견의 등당고호저(藤堂高虎邸)에 이송되어 강호유학(江戸儒學)의 개조(開祖)로 불리는 등원성와(藤原惺窩)와 용야(龍野)의 성주 城主 적송광도(赤松廣道: 아까마스히로미찌), 해운왕 길전소암(海運王 吉田素庵: 요시다 소안) 등과 자유로운 교우 중에 성와는「사서오경왜훈(四書五経倭訓)」을 완성했다.

 

강항과 두 형 그리고 수십 인이 사서오경(四書五経)의 대자본(大字本)을 필사(筆写)하였다. 성와는 거기에 화훈(和訓:일본어)를 달아 간행하였던 것이다.

 

근세 일본사상의 전환기에 강항과 등원성와의 우정은 일본인이 부러워할 정도였고, 성와가 유학자(儒学者)로서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항의 가르침이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강항이 일본유학사상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에이메현 愛媛県 오쯔시 大洲市의 홍유 강항 현창비 鴻儒 姜沆顯彰碑(1990年3月11日) 부비와 비문에서 副碑・碑文에서>

 

주3) <간양록>‘섭난사적’에는 장기 長崎(나가사키)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아마도 원문이 잘못되어 있는 듯하다.

 

주4) 대학두는 에도 막부의 관학 학문소의 최고 책임자 벼슬로, 우리나라의 경우는 대제학과 대사성을 겸임한 벼슬에 해당한다.

 

 

김세곤  segon53 @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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